
Handel Organ Concerto No. 6
in B Flat Major, Op. 4
달빛 드리운 밤
이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아이오니아인에게 있어 밤이란 하루를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다. 이건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유독 아이오니아인이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이치에 맞는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못 곁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국 같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은 웬일로 일찍 퇴근한 아들이 통나무 같은 팔뚝 사이에 끼고 돌아온 책 한 권을 떠올렸다. 그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아들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더니만 이렇게 대답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어머니. 그냥 불쏘시개니까요.”
그렇게 단언하니 오히려 호기심이 동해 책을 읽어봤더니만 아들이 했던 말이 백번 옳았다. 짧은 독서를 마치고 책장을 덮은 여인은 이 책을 위해 베어졌을 나무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필트오버의 학자가 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오니아란 국가에 대한 환상과 몰이해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이오니아인들이 인공적인 빛의 존재를 몰라서 어둠에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고상한 통찰로 덮어 씌워봤자 이건 조롱이고 또 거짓이었다. 녹서스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기 이전에도 이곳에서는 밤이 되면 자연적으로 빛을 발하는 등불 나무를 가로등 대용으로 사용했다. 애당초 태양빛과 달빛 이외의 빛을 몰랐다면 어떻게 영혼의 꽃 축제때마다 등불을 걸어둘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아이오니아인들은 지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거실을 꽉 채우다시피 하는 커다란 식탁을 펴놓고 온가족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풍경은 아이오니아에선 퍽 익숙한 광경이었다. 비록 오늘도 아들은 퇴근이 늦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지만, 여인은 귀여운 손녀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꽤 좋아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사람들은 잠자리에 든다. 이제 혼자 잘 수 있다며 자기 방을 달라고 성화를 부리던 손녀는 기어코 제 방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가 없으니 주변이 신기하게도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여인은 두 손을 모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가족을 보살펴주시는 선조들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여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염원을 담아 비는 소원은 언제나 단 하나였다.
그렇게 한참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똑똑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아들이 돌아왔나 싶었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아들이었다면 아무리 살살치더라도 똑똑이 아니라 쾅쾅 소리가 났을 테니까. 여인은 기도를 멈추고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할머니, 저 잠이 안 와요.”
아이였다. 아이의 달처럼 하얀 머리카락이 부스스 흐트러져 있었다. 치마 끝단을 프릴로 장식한 연보랏빛의 원피스가 아주 잘 어울렸다. 여인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를 방 안으로 맞이했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아이는 또래보다 훨씬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가끔은 지나치게 조숙하게 굴기도 했다. 일찍 철이 든 꼬맹이를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의 어머니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죄책감의 편린일지도 몰랐다.
아이의 손에 아들이 선물해 준 검은 토끼 인형이 들린 게 보였다. 잠잘 때마다 품에 안고 자는 저 인형은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애착 인형이었다.
검은 토끼라니. 뛸 듯이 좋아하는 아이와 달리 여인은 밤하늘처럼 새까만 털이 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토끼라면 하얀색이나 분홍색도 있을 텐데 왜 하필 검정색이냐. 그렇게 물으니 아들은 대답 없이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제 배로 낳은 아들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여인은 그때 처음 알았다. 아들은 어딘가 비통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얀 토끼는 검은 토끼와 둘이서 하나라고. 여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파고들어선 안 된다는 직감이 여인을 그리하도록 만들었다.
피가 섞였더라도 자식과 자신은 별개였다. 아들이 장성할수록 여인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아들은 점점 숨기는 게 많아졌다. 여인은, 아니 어머니는 이제 아들이 등 뒤에 감추다 흘러넘쳐 새어 나온 것들만 볼 수 있었다.
이 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들은 이 아이가 제 딸이라고 말했지만 여인이 누구인가. 부족에서 쫓겨났다 한들 여인은 평범한 인간과 차원이 달랐다. 룬테라의 그 누구보다 마법과 가깝게 살아온 여인은 마치 호흡을 하듯 마법을 다뤘고 마력을 보는 데 매우 능했다. 여인은 아이에게서 아들의 마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인은 아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손녀로 받아들였다.
왜? 이유따윈 지극히 간단했다. 언제서부턴가 소리 내어 울지 않게 된 아들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그 또한 제 잘못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쭈뼛거리며 이부자리로 다가왔다. 여인은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은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우리 아가. 왜 잠이 안 올까?”
“…밤이 되니까 너무 조용하잖아요. 그래서 좀 무서웠어요.”
여인의 질문에 아이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듣기 어려울 목소리였지만 공교롭게도 여인은 청력이 좋았다. 또 시력도 평범한 인간보다 배로 좋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만월. 달빛 덕에 사방이 환했다. 약간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얼굴이 귀여웠다. 그토록 혼자 잘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해놓고 어둠과 정적이 무서워 제 방에서 도망친 것에 창피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직 다섯 살이니까 그럴 만도 한데.
여인은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대로 눈 감고 있으면 잠이 올 거란다. 코 자자, 아가.”
“음… 그 전에 할머니이……. 옛날 이야기 해주시면 안돼요? 재밌는 얘기요.”
여인은 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늘 자기 전에 여인이 해주는 이야기를 찾았다. 아들도 이랬던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잠이 올 때면 어머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제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곤 했다. 멍 자국 가득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이토록 천사 같은 얼굴로 자는데 왜 일어나기만 하면 다쳐서 돌아오는지. 이미 까무룩 잠들어버린 아들의 손에 엉성하게 매인 붕대를 고쳐 묶어주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그러마. 흠… 밤의 쌍둥이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니?”
“네. 알아요. 밤의 쌍둥이 영혼 중에 오빠 쪽이 별을 수놓은 흑요석 화폭을 만든다던데요? 그래서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거라고 들었어요.”
“아주 잘 아는구나. 그럼 이것도 알고 있니? 아주 까마득한 옛날에는 밤하늘에 달도 별도 없었단다. 밤이 오면 세상에 어둠만 가득했지. 그래서 모두가 밤을 두려워 했다더구나.”
“그건… 좀 무서울 것 같아요.”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을 상상한 걸까?
아이는 검은 토끼 인형을 꼭 끌어 안았다. 꼭 인형이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이 아이에게도 자신과 아들처럼 짐승의 귀가 달렸다면 분명, 뒤로 한껏 눕혀져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니. 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달도 있고, 드넓게 펼쳐진 은하수도 있어. 비록 낮보다는 어둡더라도 빛이 있다면 인간들은 내일이 오리란 희망을 갖는단다. 그래서 밤을 오로지 휴식을 위한 시간으로 쓸 수 있는 거고.”
“으음…. 그건 알겠어요. 그러면 어쩌다가 밤하늘에 별이 생기게 된 건가요?”
“후훗,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밤의 쌍둥이 영혼이 밤하늘에 별을 수놓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한 영혼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
어린아이니까 사랑 이야기라면 무조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을 배반하듯 아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제 할머니를 바라 보았다.
이게 아닌가?
순간 의구심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여인이 아는 이야기는 한정되어 있었고, 즉석에서 이야기의 내용을 바꿀 만한 상상력은 부재했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마른 침을 삼킨 여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얘기해주세요.”
“그, 그래. 알았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 영혼 세계의 한 마을에 남자 아이가 하나 살았단다. 머리는 구름처럼 하얗고 눈은 작약 같은 선홍색이었지. 소년은 보호의 영혼과 유기의 영혼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별 문제 없이 화목하게 살고 있었어.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요?”
“옛날에는 밤에 빛이 없었다고 했지? 그건 영혼세계의 밤도 마찬가지였어. 너도 알다시피 어둠은 많은 것을 숨겨 주잖니. 그래서 소년의 아버지는 어둠을 틈타 영영 사라져 버렸단다. 하루 아침만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거지.”
하룻밤 만에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떠났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아이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비록 친아버지가 아닐 지언정 아들은 아이에게 헌신적이었다. 부족할 지언정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아버지와 사는 아이에게 있어, 가족을 버린 아버지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 게 분명했다.
“아버지가 사라지자 소년의 삶은 한순간에 달라지고 말았어. 칸메이와 아카나의 혼혈은 영혼세계에서 금기나 다름 없었거든. 단지 소년의 아버지가 강력한 아카나였기에 손을 대지 못 했을 뿐이었어. 아버지가 떠나게 되니 살얼음판 같던 평화가 깨졌고, 소년은 칸메이와 아카나 양쪽에게 무시 당하며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단다.”
“그럴 수가…….”
“소년은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 그리고 밤의 쌍둥이 영혼도 증오하게 되었지. 그들이 없었다면 영혼세계에 밤이 오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아버지 또한 어둠 속에 숨어 도망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거든.”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툭 내뱉듯 말했다.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응?”
“밤의 쌍둥이 영혼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텐데, 괜히 화풀이 하는 거잖아요. 그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맞는 말이었다. 밤의 쌍둥이 영혼은 소년의 아버지를 몰랐다. 아마 소년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존재할 뿐으로, 밤이 오는 데에 의도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는 가끔 이렇게 핵심을 관통하는 말을 하곤 했다. 아이는 나이에 비해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 여인은 그게 놀라우면서도 가끔은 두렵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가. 세상에는 이치만으론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잔뜩 있단다.”
“이치요?”
“그래. 아무리 합리적인 일이더라도 감정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있지. 가령 저번에 네 아버지가 일이 바빠서 너와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서운했잖니. 다 그런 거란다.”
“음… 좀 알 것 같아요. 놀아주겠다 해놓고 휴일에도 일하러 간 적이 많았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건 아는데도 기분이 안 좋았어요.”
아들은 항상 바빴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게 기적이었고, 귀가하더라도 새벽 동이 틀 때 쯤이 되어서야 겨우 들렸다가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어떤 때는 향수로 가린 게 무색할 정도의 피냄새를 풍기며 돌아와 여인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아이가 생긴 이후부터 휴일이 생겼지만 집에서 쉬다가도 연락 한 통에 직장으로 돌아갈 정도로 아들은 일에 열성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놀아주겠다거나 놀러 가자는 약속은 허구헌 날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아이는 잘 다녀오라며 항상 의연하게 굴었지만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이럴 때를 보면 또 영락없는 아이인데. 여인은 이불을 고쳐 덮어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지? 아마 영혼세계의 소년도 그랬을 거란다. 머릿속으로는 밤의 영혼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 하지만 원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너무… 슬픈 일 같아요.”
“맞아. 증오를 계속 쏟아 붓는 건 자기자신도 소모하는 일이란다. 그렇지만 소년은 한 순간에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주변의 영혼들이 자신을 버려진 아들이라 부르는 것도 싫은데 밤마다 남 몰래 눈물 짓는 어머니를 보는 일은 더 괴로웠지. 그래서 소년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고 하더구나. 빨리 어른이 되어 한 사람 몫을 하게 된다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한 거야.”
여인은 소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머리카락에 선홍빛 눈동자, 여우와 비슷한 귀가 달린 자그마한 소년. 칸메이에겐 사악하다 손가락질 받고 아카나에겐 어정쩡하다 모욕받는 일상. 버려진 아들이라는 떼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꼬리표. 의지할 존재는 오직 어머니뿐인 불쌍한 아이. 그럼에도 자신이 어른이 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풀리리라 믿었던 사내아이.
뇌리에 스친 소년의 얼굴은, 아들의 어릴 적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은 아이의 모습 그대로 성장하지 못했단다. 소년은 매일매일 호숫가에 있는 커다란 벚나무에 대고 키를 쟀지만 칼자국은 계속 똑같은 자리를 맴돌았지. 참다 못해 어머니에게 찾아간 소년은 왜 자신이 자라지 않는 거냐 물었어. 보호의 영혼이 어떻게 대답했을 것 같니?”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던가… 뭐, 그런 거 아닐까요?”
“비슷하단다. 보호의 영혼은 소년이 아직 진정한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하는 거라 말했어. 소년은 당연히,”
“납득하지 못했겠죠.”
“맞아. 그래서 소년은 늘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썼지. 모두가 두려워 하는 밤에도 아랑곳 않고 숲속을 돌아다녔고, 영혼세계를 헤매는 필멸자와 맞붙어 힘을 보이려고도 했단다. 소년은 노력했지만 계속 어린아이인 상태 그대로였어.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 같이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벚나무 호숫가로 간 소년은 보고 말았단다.”
“뭘요?”
“목, 아니 호숫가에 발을 담근 한 남자의 모습을 말이야.”
여인은 자신의 순발력에 내심 감탄을 표했다. 아무리 또래보다 조숙하고 똑똑한 손녀더라도 아직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였다. 그러니 밤의 영혼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을 소년에게 보였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줄 수는 없었다. 동심을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됐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부족의 어린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던 장로들의 고생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청년을 처음 본 순간 소년은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더구나. 소년의 삶 속에서 청년만큼 마음을 사로잡은 존재는 또 없었던 거야.”
“첫눈에 반한 건가요?”
“그렇지. 구름과 밤하늘이 뒤섞인 듯한 오묘한 빛깔의 머리카락에, 우수에 찬 옥색 눈동자를 마주한 소년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단다. 몸이 뜨겁고 좀 아픈 것 같기도 했지. 통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서 결국 소년은 기절해 버리고 말았어.”
“헉!”
“의식을 잃기 직전 소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청년의 모습이었단다.”
제 눈앞에서 픽 쓰러지는 작은 영혼을 본 청년은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그를 붙잡아 부축했다. 곧 밤이 오는데 이런 자그마한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어서 청년은 기절한 소년이 깨어날 때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에서 촉촉히 젖은 살결을 느꼈다느니, 라벤더처럼 짙은 살 냄새를 맡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한 이야기였다. 선정적인 묘사를 전부 쳐내려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소년이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단다. 그리고 밤 내내 이 청년이 자신의 무릎을 베개로 내주었다는 걸 알았지. 소년은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어. 그래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시야에 들어온 제 손이 뭔가 달라 보이는 거야. 소년은 바로 물가로 달려가 수면에 비친 얼굴을 살펴 보았어.”
“어떻게 달랐는데요?”
“전에 비해 너무 크고 길었던 거지. 손은 물론이거니와 팔다리까지 그랬어.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니 의심은 확신이 되었단다. 기껏해야 5살 같았던 소년은 어느 샌가 10살 남짓한 아이로 자라 있었거든.”
“우와… 저도 빨리 크고 싶어요.”
아이라면 원래 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걸까? 할머니 입장에서야 지금도 충분하다 못해 너무 빨리 자라는 것 같아서 아쉬울 따름인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여인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기쁨에 겨운 소년이 뒤를 돌아봤더니 청년은 온데간데 없었어. 찰나의 해후였지만 그 만남은 소년의 영혼에 깊이 새겨졌고, 소년은 이 날 이후부터 매일 밤마다 호숫가에 찾아가기 시작했단다.”
“매일이요?”
“응. 매일 밤마다 그랬지. 어쩌다 가끔 만나더라도 좋았어. 청년은 말수가 적어서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지만 소년은 그 정적마저 기꺼웠다 하더구나.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눈앞의 청년이 그렇게나 증오하던 밤의 쌍둥이 영혼인 걸 알았건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해버렸지. 그 정도로 소년은 밤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어.”
소년은 늘 이방인이었다. 칸메이는 보랏빛 왼팔을 보며 소년을 아카나라 칭했다. 아카나는 평범한 오른팔을 보며 소년이 칸메이라 말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자신은 대체 무엇인가? 진정한 자신을 봐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언제까지나 반푼이였고 금기였으며 또 ‘버려진 아들’이었다.
하지만 이 밤과 함께 나타나는 영혼은 달랐다. 소년을 모욕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이 영혼과 있으면 편안했다. 이 영혼과 있어야만 자유를 체감할 수 있었다.
“밤의 영혼을 만날 때마다 소년은 점점 성인이 되어 갔어. 같이 밤을 보내기도 했지. 이윽고 소년은 어엿한 사내가 되었단다.”
어깻죽지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어졌다. 밤의 쌍둥이 영혼보다 작았던 키는 역전된지 오래였고, 갸날펐던 몸도 뭇 장정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고 우람해졌다. 몸이 자라면서 힘도 강해져 이젠 웬만한 영혼들론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소년은 변했다. 누구보다 강해졌고 당당히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었다. 소년은 기대했다. 주변의 시선이 달라지기를.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본인부터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헤매고 있는 걸요.”
아이는 힘차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의 연푸른 홍채에 깃든 빛이 찬란했다.
“…맞아. 그는 여전히 금기의 산물이었단다. 변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사내는 호숫가에도 잘 찾아가지 않게 되었어.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우며 방황했지. 그럴수록 아카나의 기운은 점점 강해졌고…….”
“그럼 밤의 쌍둥이 영혼은요?”
“사내가 오기를 기다렸어. 사실 밤의 쌍둥이 영혼도 사내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변화가 없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 몇 안 되게 성장하는 존재. 특이하고 또 특별했다. 물질세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강대한 힘 탓에 밤의 쌍둥이 영혼들은 스스로를 세상과 괴리시키기를 택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어둠이 두렵지 않다 외치는 이 작고 어린 영혼은 풀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그랬던 작은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제 귓가에 대고 밀어를 속삭였다. 밤의 영혼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자기에게 사랑을 고하는 소년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이 소년을 아끼는 마음은 제 여동생을 그리는 마음과 같으리라 넘겨 짚었다.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방황하던 사내는 다시 벚나무가 핀 호숫가로 향했어. 거기에는 밤의 영혼이 있었지. 사내가 물었어. 날 기다린 거냐고. 밤의 영혼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내에게 다가갔어.”
“그런 다음에는요?”
“밤의 영혼이 사내의 왼팔을 붙잡자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손목에 물빛의 염주가 채워졌어. 염주가 채워지자 분노로 일렁이던 아카나의 기운은 삽시간에 잦아들었지. 염주에 아카나의 기운을 억누르는 힘이 있었던 거야.”
“아카나의 힘에 먹히지 말라는 선물인 건가요?”
“그렇단다. 놀란 사내에게 밤의 영혼은 말했어. 네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고. 너는 무력하기만 한 버려진 아들이 아니라 어떤 두려움에도 당당히 맞서는 ‘도전의 영혼’이라고 말이야.”
“와아…!”
사내는 이 순간부터 버려진 아들이 아닌, 도전의 영혼이 되었다. 도전의 영혼은 밤의 쌍둥이 영혼을 꽉 끌어 안았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저를 올려다 보는 이 남자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또 고마웠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영혼은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꺄악!”
얼굴이 붉어진 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5살 짜리 꼬맹이에겐 자극이 심한 이야기였나보다.
그 날 이후로 두 영혼의 관계는 변화했다. 도전의 영혼에게 밤의 쌍둥이 영혼과 연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게 계기였다. 스스로에게 담판 짓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다. 도전의 영혼은 밤의 영혼이 온전한 제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 방법으로 도전의 영혼은 ‘청혼’을 택했다. 법률로 맺어진 물질세계의 혼인과 달리 영혼세계의 결혼에 구속력따위 없었다.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난처해 하던 밤의 쌍둥이 영혼도 끈질긴 구애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머지 않아 이 두 영혼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단다. 하지만 언제나 함께 있을 수는 없었지. 밤의 쌍둥이 영혼은 물질세계에 밤을 내려야만 했고, 도전의 영혼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거든.”
“무슨 문제인데요?”
“아버지에 대한 문제였어. 도전의 영혼은 제 아버지를 찾아내서 묻고 싶었단다. 왜 우릴 버렸느냐고. 그런데 아무리 영혼세계를 뒤져도 유기의 영혼을 찾을 수 없었지. 그렇다면 어딜 향해야 할까?”
“물질세계… 겠죠.”
“우리 아가 정말 똑똑하구나. 맞아. 도전의 영혼은 관문이 열릴 때마다 물질세계로 발걸음을 옮겼어. 그걸 알게 된 밤의 쌍둥이 영혼은 도전의 영혼을 말렸지. 제때 돌아오지 못하면 영원히 물질세계에서 헤매게 될 테니까.”
도전의 영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전의 영혼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도전의 영혼은 제 부인에게 고했다. 이유를 모른 채 살아가는 건 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자긴 그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고.
제 부군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밤의 쌍둥이 영혼은 그의 거친 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도 빛을 의지해 나아갈 수 있도록 흑요석 화폭에 달과 별을 수놓아 줄 테니, 관문이 닫히기 전에 꼭 돌아오라고. 둘은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더구나.”
“도전의 영혼은 약속을 지켰나요?”
“그럼, 당연하지. 가끔 밤하늘의 빛이 흐릴 때도 있지 않니? 그땐 도전의 영혼을 인도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란다.”
“그럼 오늘 같은 날은…….”
“맞아. 분명히 헤매이는 영혼에게 길을 인도해주고 있는 거겠지.”
자, 이제 이야기 끝났으니 자자꾸나.
여인의 말에 아이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기색을 표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더 해줬다간 밤을 샐 판이었다. 아들이 사 온 필트오버식 시계를 곁눈질로 보니 벌써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이의 투정을 들은 체 만 체하며 여인은 누운 아이를 토닥였다. 이렇게 아이를 재우고 있자니 언젠가 들었던 자장가가 입가에 맴돌았다.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방 안에서 물처럼 번져 나갔다.
자지 않으려 버티던 아이의 눈꺼풀이 슬슬 감기고 있었다. 이윽고 아이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 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온다면 둘 중 하나였다. 아들이거나 외부인이거나. 아들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외부인일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됐다.
여인은 저절로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제 곁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단…….
“어머니, 저 왔어요.”
“늦었구나. 일은 잘 끝났니?”
경계가 무색하게 어딘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져 나갔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바라 본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이런 늦은 시간이면 차라리 직장에서 자다 오는 게 나을 텐데 아들은 늦게라도 집에 돌아와 아이의 동태를 살폈다. 그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여인은 아이가 깨지 않도록 숨죽여 물었다.
“아, 네. 뭐 그렇죠. 벌써 잠들었나요?”
일에 관해 묻자 아들은 어물쩡거리며 자신의 딸에게로 화제를 전환했다.
“방금 잠든 참이란다.”
“…그렇군요.”
이부자리에 가까이 다가온 아들은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밝은 달빛이 역광으로 그의 모습을 비췄다. 어두운 그림자가 져서 아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들은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저, 어머니. 제가…….”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벌써 새벽이니까 어머니도 빨리 주무세요.”
아들은 말을 얼버무리더니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여인은 아들의 왼손에서 빛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건 반지였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은빛의 반지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가운데에 흑요석이 박힌 반지는 누가 봐도 고급품이라 생각할 정도로 세공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아들은 화려한 장신구를 좋아했지만 가락지만큼은 별개였다. 처음 발견한 흔적에 낯이 뜨거워졌다. 여인은 장난을 치다 어른에게 들킨 어린아이처럼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문안 인사를 드린 아들은 여인의 방을 나와 제 방으로 향했다. 여인은 아들을 붙잡지 않고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아들은 필요 이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인은 아들에게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여인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들이 숨기다 못해 새어 나온 진실들 뿐이었다. 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아들은 여인이 모르는 방향으로 계속 해서 나아갔다. 여인은 제 손에서 벗어난 화살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기도를 드렸다. 부덕한 자신 때문에 방황하게 된 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더는 유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홀로 괴로워 하지 않게 해달라고.
여인은 여전히 제 배로 낳은 아들에 대해 잘 몰랐다. 혈연이라고 해도 엄연한 타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인은 아직도 제 손녀의 정체를 몰랐고, 제 아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여인의 직감은 말해주었다.
내 아들은 지금 길을 비춰 줄 달빛을 찾았다고.
그러면 됐다. 그거면 충분했다. 여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요한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