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ndel Organ Concerto No. 6
in B Flat Major, Op. 4
방 속의 방
현대 AU
“펠. 오늘 기분은 어때?”
붉은 머리의 남성, 세트라이가 물었다. 그의 품 안에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성이 누워있었다. 펠, 이라고 불린 남성의 눈은 휴대용 콘솔 게임기 화면에 집중했다.
- 평범해.
고저 없이 덤덤하고 희미한 목소리가 붉은 머리칼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사이에 숨었던 짐승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세트라이는 저보다 아담한 남성을 끌어안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좁고 작은 집, 아니 방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건장한 남성 둘이 누워있으니 어딘가 벅찬 기분을 느꼈다.
“그래? 혹시 이따가 어디 나가?”
두 사람은 폭신하고 말랑거리는 민트색 빈백에 누워있었다. 서로의 팔다리가 방바닥 위에서 엉켜도 개의치 않았다. 잡동사니의 바다를 유영하는 발끝은 다정하게 붙어있었다. 이상하고 규모도 작은 집은 평생 머무르고 싶은 둘만의 아지트였다. 이곳에 살기 전, 매물 사기를 당한 건 까맣게 잊을 정도로 말이다.
“아펠. 오늘 저녁은 내가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지?”
- 그렇게 해준다면 고맙지.
세트라이는 훗날 결혼을 한다면 마당이 넓고 주차하기도 편한 단독 주택에서 살고 싶었다. 지금처럼 좁고 구조도 이상한 집이 아니라. 하지만 함께 사는 이웃, 아펠리오스와 함께 한다면 지금처럼 몸을 접고 살아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세트라이는 아펠리오스가 마음에 들었다. 호감 수준이 아니라 인생을 바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쪼개진 집을 하나처럼 사용하고, 사랑도 이루면 윈윈 아니겠는가? 마침 서로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싶으니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고 싶었다. 세트라이는 아펠리오스가 잠시 외출을 한 사이 장을 봐왔고, 좋은 와인 여러 병을 픽업해 왔으며, 커플링으로 낄 반지도 마련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즐기면서 멋진 말을 읊는다면 아펠리오스를 반드시 저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럼 준비하러 가볼게. 다 되면 부를 테니까 게임 볼륨은 작게 해두고.”
- 알겠어.
세트라이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손에 게임 기기를 든 아펠리오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양손으로 몸을 받쳐주었다. 조심스레 눕혀주자 잘 진행되던 게임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게임 오버’라는 붉은색 글씨가 떴다.
- 하….
“요즘 거기서 막히는 거 같더라?”
- 패턴이 이상해. 이런 걸 어떻게 깨.
“될 때까지 들이박는 수밖에 없지. 오늘 안에 깰 수 있겠어?”
- 응. 반드시 오늘 안에 결판낼 거야.
“저녁 먹고 나면 다르게 보일지도 몰라.”
- 식사 끝내기 전에 마무리 지을 듯.
“그래. 나 그때 중요한 말 할 거니까 식탁에선 게임기랑 이별해 둬.”
- 응.
세트라이가 온전히 일어서기 전, 아펠리오스가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체격 차이가 나지만 세트라이는 아펠리오스의 손길만 닿아도 비누만큼이나 물러지는 남자였다. 근육질의 몸이 앞으로 천천히 기울여졌다.
“하, 방심했네.”
그는 아펠리오스를 깔아뭉개기 직전에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둘의 얼굴이 교차했다. 숨결이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 속에서 뒤섞였다. 세트라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장난기 가득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요즘 따라 심술이 늘었잖아. 잘 안 풀려서 그래?”
- 응. 그래서 기분이 별로야.
“이런, 내가 풀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 …네가? 어떻게.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니까? 내 요리 실력 잘 알잖아. 네가 좋아하는 것만 차릴게.”
- 별로기만 해….
“나 믿어. 나 어떤 남자인지 알잖아. 이제 진짜로 놔주는 거지?”
- 잠깐이야.
“그래, 이따가 다시 잡히러 올게. 그때까지 푹 쉬고 있어.”
멱살을 쥔 손이 스르륵 풀렸다. 세트라이는 가뿐하게 일어나 좁은 방을 가로질렀다. 현관문과 이어진 벽에는 툭 튀어나온 공간이 있었다. 방 속의 방, 이웃집 사내는 그곳으로 쪼르륵 들어갔다. 문을 열면 옷 따위를 넣어두는 공간이 나온다. 그리고 아펠리오스의 공간에서 문을 열면, 세트라이의 집에 붙은 작은 방이 나타난다.
방 하나로 이어지는 집, 그곳이 세트라이와 아펠리오스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방 쪼개기의 피해자인 두 사람은 계약금을 들고 해외로 도망쳤다는 집주인을 잡을 수 없었다. 세트라이가 공범인 공인중개사를 협박해 집주인이 몸을 숨긴 장소를 알아냈지만, 아펠리오스가 저지했다. 훗날 조용히 입국할 때, 그때 법적으로 귀찮게 굴자며 말이다. 이렇게 서로는 나름대로 좋은 이웃이었다.
아펠리오스가 취향인 줄도 모르고 일 년 가까이 이웃 사이로 한정 짓다가, 최근에서야 마음을 자각해버린 로맨티스트. 이제 직진만 남은 세트라이는 쪼개진 집을 원래의 목적에 맞게 하나로 합치고 싶었다. 그렇다면 아펠리오스는 세트라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세트라이는 냉장고를 확인하며 잘 정돈된 음식 재료를 확인했다. 이처럼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상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세트라이가 떠난 공간에서, 아펠리오스는 휴대용 게임 기기를 껐다. 집과 집을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쳐다보며 그날을 되새겼다. 막 이사를 마친 날, 밤이 깊은 순간이었다. 구름도 잔뜩 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빛이라고는 어둑한 가로등 불빛이 유일했다. 막 잠이 들 것처럼 몸이 붕 뜨던 순간에, 불길한 소리가 아펠리오스를 찾아왔다. 쇠가 부대끼는 소리는 무척이나 컸고, 혼자 사는 아펠리오스의 정신을 벅벅 긁어댔다.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현관 밖을 확인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은 지금 당장 실행하기도 어려운 노릇. 메슥거리는 가슴을 꾸욱 누르며 현관만 바라볼 때였다.
아펠리오스는 문득 깨달았다. 불청객 같은 소리는 현관이 아니라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툭 튀어나온 미지의 공간. 방 속의 방에서 끊임없이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문고리가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펠리오스는 입을 벌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수상했던 장소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잡아먹었던 용기는 예상치 못한 계기에서 터져 나왔다. 아펠리오스는 기겁하며 근처에 놔두었던 페트병을 집어 들었다. 반 정도 남은 이온 음료가 찰랑거렸다. 그는 옷방 속 괴물이든, 숨어 있었던 침입자든 전부 쓰러뜨릴 기세로 페트병을 휘둘렀다.
“악! 뭐야!”
고통의 찬 신음이 좁은 방에 넘실거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끙끙거리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여겼다. 아펠리오스는 제가 실수했음을 단번에 깨달았다.
이 사람은 강도도, 괴물도 아닌 옆집에 사는 제 이웃이었다. 저보다 하루 이틀 먼저 입주했다던 그 사람 말이다.
- 잠, 잠깐만. 괜찮아요?
- 그것보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요?
가까이 다가가자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물씬 흘렀다. 온몸을 적셨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나? 아펠리오스는 당장 불을 켰다.
- 봐요. 어디 맞았어요.
“이거, 숙취가 아니라 당신이 때린 거였어요? 참나, 나 이런 남자 아닌데.”
- 구급차 불러요?
“됐어요. 그쪽이 때려봤자 얼마나 심각하다고….”
아펠리오스는 페트병 따위가 아니라 식탁 의자를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집에 침입한 주제에 태도가 뻔뻔했다. 구급차가 아니라 경찰을 부르는 게 옳다는 판단이 섰다.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왜 여기로 나왔지?”
아, 맞아. 이 남자는 잠겨 있었던 작은 방에서 튀어나왔다. 아펠리오스는 수상한 방이 주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벌떡 일어나 방 속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휑하고 어두운 공간이 눈앞에 있었다.
아펠리오스는 한 걸음씩 옮겨 건너편으로 손을 뻗었다. 서늘한 온도가 손을 감쌌다. 낯선 냄새가 조금씩 뒤섞이고 있었다. 그는 건너편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어이없게도 또 다른 작은 방을 맞닥뜨렸다. 거길 지나자 제집과 똑같은 구조의 집을 돌아볼 수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사람을 후려쳐서? 아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이상한 집 구조, 방 속의 방, 소음이 여과 없이 흘러들어오는 벽. 모든 단서가 하나로 모였다. 아펠리오스는 깨달았다. 원래 이 집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리라. 추후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보증금 반환 및 서류상의 문제가 두 사람을 기다릴 것이라는 점도…….
***
세트라이는 방 속의 방 밖으로 빠져나오며 눌린 뒷머리를 정돈했다. 방음이라고는 제대로 되지 않는 간이 벽 너머로 심장 박동이 넘어가진 않을까 걱정했다. 좁은 주방, 간혹 멈추는 냉장고는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만, 훌쩍 떠날 생각은 없었다. 거울 너머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반대편에 사는 사람을 떠올리면 문제 따윈 말끔히 사라졌다.
그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꺼낸 뒤 아담한 창문을 열었다. 오늘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환기가 그나마 잘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계획된 일이 잘 풀리길 기대했다.
소박한 테이블 위엔 아펠리오스의 경계를 풀어줄 식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을 이끌어줄 와인까지. 이제 남은 건 세트라이의 행동뿐이다. 그는 방 속의 방으로 들어가 아펠리오스의 문에 대고 노크했다.
그는 생각했다. 평범하게, 부담 갖지 않게. 처음은 가벼운 저녁 식사일 뿐이니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갈아입은 셔츠에 혹시나 얼룩은 없나 점검했다.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저기, 아펠리오스. 저녁 먹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머리가 굳었다. 세트라이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아펠리오스가 아니었다. 작고 아담한 여성? 어떻게 성인 남성이 사는 집에 있지? 이건 계획에 없는 상황인데?
아냐, 아닐 거야. 세트라이는 이 여성이 아펠리오스의 ‘그런 사람’이 아니길 바랐다. 그간 봐왔던 이웃집 남자는 외주 작업을 하느라 외출을 소홀히 하고, 성욕조차 미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집에 있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숙녀 앞에서 생각이 많았네요.”
세트라이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투를 흉내 내며 예의를 차렸다. 지금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알 수 없으므로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아펠이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말했어요. 아, 전 알룬이라고 해요. 원래 제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좋은 이웃을 만났다고 하길래 한시름 놨어요.”
원래, 옆에서, 도와줬다고? 세상에 맙소사.
그리고 ‘좋은 이웃’으로 나를 소개했다고?
“이사한 집이 좁아서 제가 함께 살 순 없더라고요. 그래도 아펠이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 편하게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세트라이는 이 여성의 입을 막을 순 없으니, 방 속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그간 세트라이가 쌓았다고 생각한 건 사랑이 아니라 이웃 간의 유대였던 걸까? 혼자서 삽질을 한 걸까? 아아, 시작조차 못 해보고 실연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아펠리오스가 이 상황을 정리해주길 내심 바랐다. 하지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 이 상황을 정리해주진 않았다. 어쩌면 아펠리오스가 세트라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세트라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가 흐려지지 않도록 연기했다.
“아펠리오스. 이웃집에 이런 사람이 살고 있으면 좀 잘하란 말이야.”
- …잘 해주고 있어.
“이웃에게 저녁까지 맡겨놓은 거 아니야? 내가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잖아.”
- 하지만 세트라이가 먼저 제안했어.
“맞아. 내가 먼저 제안했어. ‘평범한 이웃’끼리 저녁을 자주 먹을 뿐이고. 이 집 이상하지? 이런 곳이니까 사람끼린 친해야지.”
“그건 맞네요. 그나저나 제가 둘의 식사를 방해했나 보네요? 어차피 확인할 건 거의 다 했으니까 자리 비켜드릴게요.”
“아펠리오스. 숙녀분이 온다고 미리 알려주면 좋았잖아.”
- 깜빡했어.
“그래. 바쁘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지? 어차피 재료도 남아서.”
“만들어주신다면 기꺼이 먹고 갈게요. 그리고 아펠이랑 하고 싶은 이야기도 더 있었고.”
알룬이 아펠리오스의 곁에 가까이 붙자, 아펠리오스는 알룬의 어깨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세트라이는 속이 타오르는 것처럼 박박 쓰렸다. 일찍 시작이라도 끊었더라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단 넘어와.”
세트라이는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식사 1인분을 더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만들어두었던 기존의 음식은 식어버리지만, 새로운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는 건 정말, 어렵지 않았다.
***
서로를 위해 조성한 식탁, 정성스럽게 고른 와인,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만든 음식. 세트라이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아펠리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차려준 식사를 늘 맛있게 먹어주었다. 심지어 언젠가 함께 방문했던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보다. 그래서 헷갈렸다.
제가 만든 걸 좋아하길래 저에게 마음이 있다고 말이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호감을 드러내는 행동이 모두 애정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데. 세트라이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미래 계획을 짠 순간이 모두 멍청한 짓처럼 느껴졌다.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좋은 이웃으로 남아 우정이라도 쌓아야 할 것이다.
- 맛있어. 그렇지, 알룬.
“응. 정말 맛있어. 딱 아펠이 좋아하는 느낌이야.”
- 알 거 같아?
“확신했어.”
- 확인은 다 끝났어?
세트라이는 분위기가 미묘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 느꼈다. 알룬이 깔끔하게 비운 접시 위에 식기를 얹었다.
“진짜로 안심할 수 있어. 아, 진짜. 오빠가 걱정한 거에 비해서 너무 확실하잖아. 지금 세트라이 씨를 봐. 곧 울 것 같잖아.”
이어 알룬이 양손을 들어 작은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트라이의 예민한 귀에는 꾹 참는 웃음소리가 잡혔다.
- 하지만 난 네가 본 걸 아직도 모르겠어.
세트라이는 자신이 놓친 대화의 흐름이 있나 되새겨보았다.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이 날아가기라도 했나? 대체 뭐지? 그가 상황 파악을 할 때였다.
“오빠. 나 안 믿어? 빨리 말해. 분위기 애매하잖아!”
알룬이 오른손으로 아펠리오스의 어깨를 냅다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세트라이의 머리를 일깨웠다. 무언가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기,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지?”
“봐! 아펠리오스! 놓치지 마!”
내내 세트라이의 시선을 피하던 아펠리오스가, 제 몫의 와인, 한 입도 머금지 않은 붉은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울대가 꼴깍꼴깍 움직였다. 세트라이가 무리하지 말라며 손을 뻗었을 때, 아펠리오스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늘 차가웠던 손이 뜨겁게 달라붙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세트라이의 촉이 섰다.
- 세, 세트라이. 날 책임져 줘.
“꺅!”
- 너랑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었어.
- 이참에 한 집으로 합치는 것도,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아펠리오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취기 너울거리는 뺨 위로 더욱더 붉은 감정이 덧칠해졌다. 세트라이는 불확실성을 뛰어넘고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아펠리오스. 바라던 바야. 결혼으로 내 모든 걸 너에게 바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