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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청혼

‘나 결혼해.’

세트는 마시고 있던 차를 하마터면 다 뱉어낼 뻔했다. 간신히 이성을 유지한 채 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나 결혼한다고.’

“허…….”

주변에서 쟤 꼬시는 건 어렵다고 다들 뜯어말릴 때 그만뒀어야 했나. 아펠리오스의 담담한 발언에 세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꽤 분위기가 좋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은밀하게 저를 찾아오는 이 비밀스러운 암살자가 저를 좋아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펠리오스는 아주 수동적인 남자였다. 루나리의 지시 외에는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는 일이 없는 남자. 그런 그가 매일 밤 자의로 세트의 방에 방문한다는 것은, 그것도 고작 소소한 일상 대화나 몇 마디 나누러 온다는 것은 사심이 담겨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하루이틀 오다 말겠거니 했던 게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은밀한 사랑을 느낀 건 자신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됐다.

“언제? …갑자기?”

‘다음 주.’

이건 뭐……. 세트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턱을 문질렀다.

“루나리에서 시켰냐.”

‘…….’

아펠리오스가 대답 없이 세트를 바라보았다. 맞나보군.

반년 동안 아펠리오스와 교류하면서, 세트는 그에게 큰 애정과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투기장에서 만나 제 방으로 그를 초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펠리오스가 어째서 그렇게 눈에 띄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운명처럼 그의 외견에 이끌렸고 유려한 외모에 가려진 그의 강함에 이끌렸다. 이방인을 자꾸 방에 들이면 안 된다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달빛처럼 마음에 스며든 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제 영역 안에 거두고 싶었다.

“뭐……. 어쩔까. 오라고? 결혼식에?”

‘오고 싶어?’

암, 가고 싶고말고. 하객이 아닌 주인공으로. 세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신부는? 결혼 상대가 있다는 소린 한 번도 못 들었다고.”

‘잘 몰라. 그렇지만 해야 하니까.’

“오케이. 너다워.”

그 결혼식은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아펠리오스를 너무 자유롭게 생각하도록 내버려둔 걸까 반성했다. 그저 만나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이 나날들이 평범하고 소중해서 묵혀두었던 감정을 상기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파혼시킬 준비를 해보실까.

“아펠리오스. 결혼이란 건 말이지……. 너의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 인생의 반려가 될 사람과 하는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아펠리오스가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했다. 세트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더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 고요와 평정을 유지하는 저 말끔한 얼굴을 한 번쯤은 괴롭혀주고 싶었던 참이었다. 세트는 창가에 기대어 있던 아펠리오스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의 옆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심을 담은 첫 스킨십이었지만 거부 의사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알려줄게. 누구랑 결혼해야 하는 건지.”

손을 잡아 제 쪽으로 그를 약간 당겼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펠리오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손안에 그의 뺨과 귀를 담아 매만졌다. 차갑고 부드러운 달빛을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누구랑 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 있어?”

‘…….’

대답도 표정도 없다. 아- 속상하네. 세트는 날숨에 깊은 한숨을 숨겼다. 진짜로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없으면 적어도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랑 해야지. 일면식도 없는 사람 말고.”

‘좋아하게 되면……’

아펠리오스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생각이 정리된 듯 눈썹이 일자로 뻗으며 결연해졌다. 영원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계속 보고 싶고……. 자꾸 생각나고, 더 알고 싶고. 그런 거야?’

“……맞아. 그런 사람 있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아펠리오스의 작은 속삭임이 가슴속 깊은 곳을 간지럽혔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무언의 암시를 받아버린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렸다.

‘같은 종교도 아니고, 같은 종족도 아니야.’

“저런.”

‘심지어 여성도 아닌데.’

“흠…….”

‘그리고…….’

세트의 귀가 까닥거렸다. 웃음이 새어 나올까 봐 집중한 탓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바보냐?”

계속해서 은근하게 문지르던 아펠리오스의 뺨을 꽉 꼬집었다. 아파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기가 찼다.

“왜 몰라. 어떻게 모르냐.”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 없잖아​.’

“뭐, 그렇긴 한데. 다시는 여기 안 오고 도망갈까 봐 그랬지.”

‘그럼 좋아해?’

당돌한 질문에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귀여운 놈. 세트의 대답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자 아펠리오스의 얼굴에 그늘이 일렁였다. 조금만 빈틈을 주면 어두워져 버리기나 하고.

꼬집어서 약간 붉어진 오른쪽 뺨에 입을 맞췄다. 단맛이 나서 그대로 빨아 먹어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아펠리오스가 반응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고 입술을 맞붙였다. 커다란 손으로 뒷목을 감싸 제 쪽으로 끌었다. 얌전히 눈을 감는 꼴이 사랑스러웠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답지 않게 그를 배려하는 바람에 늦어졌다.

“엄청 좋아하지.”

‘…….’

“그래서 너 결혼 못 해. 내가 엎을 거거든.”

말이 끝나는 대로 다시 입술을 들이박았다. 잠시 떨어지는 순간도 아쉬웠다. 집어삼킬 기세로 입술을 탐하고 맛보는 동안 갈 곳 잃은 아펠리오스의 손을 제 허리에 끌어와 감도록 시켰다. 바보같이 벌어진 입술 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달밤에 핀 꽃의 꿀을 탐하는 것처럼, 달고 진한 맛이 났다.

‘하-,’

한참 동안 달큰한 키스를 나누다 입술을 떼자 아펠리오스가 숨을 골랐다. 첫 키스인가? 상기된 아펠리오스의 뺨과 입술을 번갈아 보던 세트는 그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파혼해.”

‘…결혼하면 아기를 낳아야 하는데.’

“허?”

‘세트 너는 아기를 낳을 수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덩달아 심각해진 세트가 고민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지 알고?”

의외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시했나. 그에겐 심각한 사안일 텐데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서툰 키스 실력만 봐도 성교육을 제대로 받긴 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장난기가 생겨 아펠리오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랑 아기 만들던지. 안 해보면 모르는 거잖아.”

‘세트.’

“농담이야, 농담. 좀 웃어라.”

평생을 몸담아 온 종교의 명을 과연 반대할 수 있을까? 루나리로 점철된 그의 기구한 인생을 생각하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현듯 인생에 나타난 바스타야 남자 하나를 위해서 과연 아펠리오스가 그런 행동을 할까. 입력한 대로 움직이는 암살자이자 무기가 제대로 된 자아를 가지고 스스로 파혼할 의지를 보일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어쩐다……. 진짜 가서 엎어? 타곤에 가서 아펠리오스를 내놓으라고 한바탕 날뛰는 건 세트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세트와 아펠리오스 둘 모두에게 옳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루나리라는 건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의지할 데 없는 아펠리오스에게는 소중한 곳이었으니.

‘그럼 아기만 가질게.’

“뭐?”

사레가 들린 세트가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필요한 건 애니까.’

“허어…,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네.”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질 아펠리오스를 상상했더니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렇겐 안 되겠는데.

“안 돼.”

‘왜?’

“왜냐니. 당연히 안 돼.”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세트. 그건 확실히 할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어디서부터 잘못됐다고 알려줘야 할지 몰라 세트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모습 역시 그답다. ‘아펠리오스’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악의 하나 없이 내뱉는 잔인한 의견이 종종 세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냉랭한 외모와는 달리 생각보다 속 깊은 모습에 놀랄 때가 있는가 하면, 당연한 상식이 부족하고 낮은 윤리의식에 놀랄 때도 많았다.

“펠……. 넌 내가 다른 여자랑 애 가지면 어떨 것 같냐. 그냥 그런가보다~ 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니. 그딴 상황은 없어.”

단호한 세트의 대답에 아펠리오스도 더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둘에게 언쟁이 생긴다면 열에 열 세트의 말이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펠. 결혼을 하면 몸과 마음은 부부끼리만 나누는 거야.”

‘음…….’

“결혼은 아까 누구랑 하는 거랬지?”

‘좋아하는 사람.’

“너 나 좋아한다며.”

아펠리오스가 지그시 세트를 바라봤다. 달빛을 받은 창백한 피부 위, 한 떨기 꽃송이 같은 입술은 다시 한번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아름다워서 감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 역시 아펠리오스를 향한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둥 애를 낳겠다는 둥 헛소리를 들으니 생각보다도 더 속이 끓었다.

“나랑 결혼하면 되겠네.”

‘근데 우린 둘 다 남자고…….’

“아이오니아에서는 한계가 없지.”

아펠리오스가 세트에게서 시선을 옮겨 창밖에 환하게 뜬 만월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루나리라는 알을 깨고 나오긴 힘들 것이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흔들리는 아펠리오스는 흔하지 않아서,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결혼하자, 펠.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아펠리오스의 왼쪽 손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약지에 입을 맞췄다. 좋은 곳에서 반지를 구해와야겠어. 반지 하나 없는 청혼이라니. 급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를 향한 마음과 가지고 있는 재력에 비해 초라한 청혼을 해야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 결정은 네 몫이야. 널 협박하지도 붙잡지도 않아.”

아펠리오스가 자의로 결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겨냥한 말이었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아펠리오스가 되도록, 세트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 * *

 

‘믿어보고 싶어.’

아펠리오스가 평생 할 줄 아는 거라곤 오직 '믿는 것'뿐이었다. 그 믿음의 바운더리는 숨 막힐 정도로 굉장히 좁았고 그 안에 세트라이를 욱여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펠리오스는 반년의 시간 동안 그렇게 차츰차츰 세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진전되지 않음에 답답함을 먼저 느낀 사람은 의외로 아펠리오스였다.

사실 루나리에서는 아펠리오스에게 결혼을 명한 적이 없었다. 물론 조금 더 미래엔 그런 지령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으라는 것까지도 정말 시킬지도 모른다. 세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아무 여자와 혼인을 해서 번식을 위한 교제를 거리낌 없이 했을 터였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세트라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강제 결혼이 부조리한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저를 위해서, 세트가 화내줄까? 그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도발이었다.

그리고 세트에게서 돌아온 청혼이라는 대답은 우습게도 아펠리오스를 기쁘게 했다. 결혼은 누군가와 결속되는 구속과도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왼손 약지에 입 맞추며 사랑을 고백하는 세트의 모습을 보고 아펠리오스는 가슴 깊이 차오르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날 믿어, 펠.”

‘…….’

“이리와.”

세트의 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든든하고 따뜻했다. 이렇게 나약하게 남에게 몸을 맡기고 의지하며 기대다니. 아펠리오스는 세트의 가슴팍에 기댄 채 표정 없이 눈을 깜빡였다.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어색하고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거칠게 구르며 살아온 그를 깨어질까 부서질까 다루는 세트가 이상했다. 모든 상황에 저를 아끼고 아끼는 이 남자가 좋았다. 그래…….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 사람과 하고 싶다.

‘좋아해, 세트.’

“…….”

‘너랑 결혼할게.’

번쩍번쩍 들어 올려지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세트와 있으면 언제나 생소한 상황을 맞이하곤 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진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 넓은 품에 끌어안기거나 첫 키스를 하는 일도, 다 처음인 건 매한가지였다.

“긴장 풀어, 펠. 오늘 밤은 기억에 남을 테니.”

그에게 안겨 침대에 눕혀지는 동안 아펠리오스는 얌전하게 굴었다. 그가 또 저에게 어떤 처음을 선사하는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제 위를 차지한 세트의 등 뒤로 비치는 달빛이 예뻤다. 청혼받기에 참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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